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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샨나 | I. 연본

 

" 이것은 진실을 등진 비겁자의 회고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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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진실을 등진 비겁자의 회고록이다.

 

「 ···50번째 시도 종료··· 」

「 ······시스템을 재기동합니다······ 」

 

 

머리 위 하늘이, 발 밑 바닥이 무너져 간다. 입력된 프로그램에 맞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져 간다.

일말의 불만조차 없이 잠들어 다음 일어날 때가 되면 눈을 뜨는 삶이 눈앞에 한가득이다.

 

'언제부터일까.'

 

짜인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이면 되는 이들이 부러워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을 되짚어도 떠오른 기억이 몇 번째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도 명확히

어떤 기억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기억, 하고······"

 

모래처럼 쌓인 인과가 온몸을 동여맨다. 이대로 수몰당할 것 같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쳐도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몸은 채 서 있을 힘조차 없다. 기침을 여러 번 뱉어도 눈가에서 물이

역류할 뿐 폐는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한없이 쪼그라든다. 눈앞이 어지럽고, 빙빙 돌기 시작한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수없이 내뱉어 빛바랜 말을 또다시 토해낸다. 과부하 된 머리가 곧 터질 폭탄처럼 두근두근 맥동하고, 심장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끝을 달린다. 마디에서부터 심장까지 전기가 통하듯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살과 근육이 여러 갈래로 터져 나갈 것처럼 힘겹다.

전부, 기억, 해야···.

몰려오는 고통이 선을 넘어서자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한다. 전선 다발을 자르듯 신경이, 정신이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잠뜰님."

 

···아. 어김없이, 너희는 이번에도 나를 기어코 살려내는구나. 가장 인간을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미지근한 온도가 손등에 퍼진다. 뭉툭한 폴리곤 같은 촉감이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인간 같다.

바닥으로 떨어진 고개를 올리면 걱정스레 나를 보는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에는 삐죽빼죽한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을 가진 정장 차림의 남자.

오른쪽에는 결 좋은 갈색 머리를 아래로 내려 두 갈래로 묶고 푸른 눈을 한 정장 차림의 여자.

모자란 주인을 만나 50번째··· 아니, 51번째 같은 세계를 반복하는 불쌍한 내 피조물들.

부족한 주인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시작과 끝을 반복해야 할지 모르는 불행한 나의 메이키스.

 

"나는 또다시 실패했어······"

 

울컥 차오른 고통이 눈가에서 방울져 떨어진다. 이런 꼴이 참 우습다. 모든 건 내가 책임지겠다고 서둘러 사람들을 밀어 넣던 과거는 어디 가고 끝없는 고통에 빠져 몸부림치는 어리석음만이 남은 채다.

 

"나는 또, 실패했어."

 

미지근한 온도가 두 손과 맞닿은 탓인지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울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다. 천천히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속삭인다. 나를 죽여줘. 어깨가 크게 흐느끼며 옅은 울음이 바닥과 얼굴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새하얗게 말라가는 바닥과 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두 눈을 감았다.

시야가 닫히자 안락한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이 부서져 가는 소리조차 점점 멀어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폭주하는 몸뚱아리와 연결된 '실'이 점점 풀어지는 느낌뿐. 이건 아마도 상냥한 나의 리시버와 의지가 내 안에 쌓인 인과를 풀어주기 때문일 테지.

심장에 꽂혔던 응어리가 빠지기 시작하자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폐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한다.

끝을 향해 미친듯이 달리는 기관차가 불꽃을 틔우다 멈추고, 전신을 뒤덮은 고통이 차분히 사그라든다. 겨우겨우 트인 숨통으로 길게 숨을 내뿜자 금세 안정이 몰려온다.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비명처럼 날아든 한 마디가 심장에 꽂혔다.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움찔하고, 겨우 되찾은 호흡이

흐트러졌다. 나는 편해선 안 돼. 지금도 세상은 나 때문에 하루하루 지옥일 텐데 정작 지옥을 만든 내가 편해서는 안 되잖아. 안도감 느끼지 마. 편하게 느끼지 마. 나는 그럴 자격 없어.

 

"그럴 자격 없다고···!"

"설계자님!"

 

머리끝까지 치솟은 강박이 주먹에 깃들어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과 함께

손끝에서 새빨간 눈물이 흘렀다. 서둘러 메이키스가 잡으려 해도 손은 뼈가 부서질 것처럼 끝없이

바닥을 내리쳤다.

괴롭고, 두렵다. 얼마나 더 실패해야 모두를 살릴 수 있을까.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모두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바깥은 어떻게 됐을까. 이대로 나가도 될까? 차라리 여기서 모두 영원히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단 5명뿐인 낙원이지만, 죽을 수도 있지만 다시 살려내면 되잖아. 리셋된다고 해도 내가

노력해서 에디까지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늘 그렇듯이.

···그런데 다들 바깥을 궁금해하면? 내가 세상을 멸망시킨 걸 알면? 분명 저번처럼 나를 죽일 거야. 손에 든 지팡이로, 붓으로, 단검으로, 총으로 거리낌 없이 날 죽일 거라고. 날 죽인 후 사람들은 전부 바깥으로 나가려 하겠지. 하지만 마지막 열쇠인 내가 없으면 갈 수 없다는 걸 알면 어떻게 행동할까? 괜히 나를 죽였다고 생각하며 후회할까. 아니면 모두 포기하고 이대로 살자고 할까. 아니면···

 

"그만두세요, 제발!"

 

비명 같은 목소리와 함께 망가진 손이 공중에서 우뚝 멈춘다. 초점을 잃은 시선이 바닥에 처박히고, 노이즈를 내는 팔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틈을 놓치지 않은 의지와 리시버가 빠르게 부서진 데이터를 주워들었다. 주인이라면 끔찍이 따르는 불쌍한 이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메이키스.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철저하게 교육된 AI는 어떤 결론을 내릴까. 어떤 답을 할까. 너희가 나라면 달라졌을까.

등장인물은 작가의 머리를 뛰어넘을 수 없다지만 너희는 가능할 거야. 그래. 너희는 스스로 성장하고 판단하는 AI니까. 새까맣고 파란 시선이 나를 향한다. 힘없는 웃음이 입가에 매달린다.

 

"내 실수로 세상이 망했어. 사람들은 물론 지상에 살아 있는 생물 하나 없어질 세상을 두고 동료와

벙커로 도망친 후에, 그 동료들이 내 욕심 때문에 벙커에서 수십 번, 수백 번 죽었고 바깥은 나 때문에 멸망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됐어. 그러면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입력되지 않은 데이터이기에 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회차까지 답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하하."

 

다음, 까지라. 답을 들은 순간 너무도 슬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희는 다음에도 내가 실패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오랜 데이터와 고도화된 지능이 예측한 미래에도 나는 실패하는구나. 금방이라도 온몸이 무너질 것 같아 나는 손 틈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명확한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뜰님."

"···아냐, 괜찮아···"

 

그래, 너희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모든 건 나로부터 비롯되었고 단 하나의 추억조차 전부 기억하겠다는

아집을 부린 건 나다. 내 과오로 얼룩진 세상을 등진 것도,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동료를 막아선 것도 전부 내 선택이니 누구를 탓하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바깥은 이미 연구소에서 누출된 가스가 점령했을 터다. 이곳에 들어온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곳은 내 동료들만은 살리고 싶어 택한 마지막 벙커다. 그러니 너희만은, 너희만은 죽으면 안 된다. 세상을 버리고 선택한 너희니까···.

 

'내가 널 왜 혼자 불렀는지, 넌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머릿속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등을 타고 오른다. 손끝이 아릿하게 떨리고, 가감 없이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얼굴을 덮은 손을 천천히 내리자 사라진 기억이 눈앞에 있다. 안 돼. 머릿속을 틀어막으려 해도 기억은 이미 눈앞에 있다.

 

'내가 정말 너를 몰아세우길 바라?'

 

불협화음은 늘 홀로 선 별로부터 시작됐다. 메이키스를 구성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개발자이자

기술자인 네 번째 관조자는 으레 마주칠 때마다 나를 불렀다. 때로는 일부러 네 번째로 설정한 이유조차 부숴버린 채 대뜸 찾아와 진상을 요구했다.

 

'나한테만이라도 솔직히 말해. 이 잔여 데이터는 뭐야? 너한테 속한 데이터양이 왜 이렇게 거대해?

네가 거쳐간 곳마다 전부 데이터가 박살났어. 설마 이게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각별은 메이키스의 최종 방어 권한 직전까지 뚫어서 알아낸 기밀 정보를 조용히 건넸다. 아마도 네 번째 관조자는, 다른 세 명이 '바깥'을 접해 쏟을 분노를 자신의 선에서 막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손을 잡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빨리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난 몇 번이고 그 질문과 마주할 수 없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건 내 잘못인데 어째서 그 잘못을 함께 지려 하는가. 나는 그 지독한 상냥함이 싫었고, 도망쳤다.

 

'···미안.'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

'말할 수 없어.'

'···그래. 그게 네 선택이란 말이지.'

 

우리는 늘 평행선처럼 맞섰다. 접선 하나 긋지 못한 채 나란히 평행을 달리다 나락으로 처박혔다.

아니, '우리'가 각별을 나락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방금 총소리 뭐, ···?'

 

으레 미로가 [폐기]라는 꽃을 피울 즈음이면 짜 맞추기라도 하듯 다른 관조자들이 찾아왔다. 저마다

충격받은 얼굴로 내 앞에 쓰러진 자를 살피러 다가왔다. 한 존재가 0과 1 의미 없는 숫자로 변하는 걸 보며 셋은 절망과 분노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어느새 내 곁에 나타난 총을 든 NPC는 새까만

총구를 셋에게 겨눴다. 그때마다 나는 그 총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되뇄다.

 

'어떻게 안 거지? 얘네는 왜 지금 온 거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 그래. 초기화하면 돼.

그러면 모두 잊어버릴 테니까.'

 

미로의 의지에 따라 총과 맞은 데이터는 즉시 폐기된다. 그래, 원하는 상황이 아니면 전부 사라지도록

내가 설계했다. 인격 프로세스는 백업이 되니 nn번째 인격만 지우면 우리는 금세 다시 만날 수 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만나서 친구가 됐다가 결국에는 갈라지겠지만.

 

'······.'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싸워야 할까. 얼마나 더 죽여야 할까. 얼마나 더 죽을까. 겨우 50번째 루프인데도 너무도 고통스럽다. 이제 더는 모두와 웃으며 마주할 자신이 없다. 진심으로 웃었던 적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또 실패할 거야.'

 

이대로면 나는, 우리는 영원히 이 굴레를 반복할 것이다. 언제까지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것도,

결국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갈 거라는 것도 안다. 언제까지고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나는 내 손으로

멸망한 세계와 마주해야 한다. 진실을 안 동료들이 나를 떠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세상을 책임질 용기조차 잃어버려 이 미로에 뛰어들지 않았는가. '혼자' 남고 싶지 않아 비겁하게 사람들을 밀어 넣고 이곳으로 오지 않았나. 눈앞에 놓인 벽이 아득히 높아 채 오를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언젠가는 올라야 할 벽인데도 시도조차 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벽에 막히면 어떻게 하냐고?'

 

물음과 동시에 뇌는 지나간 기억 하나를 꺼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들은 건 아마 스물세 번째

루프였던 것 같다. 데이터를 가득 지닌 나 때문에 처음으로 시나리오에 오류가 발생한 날, 우리는

예정된 목적지에 가지 못 하고 근처에서 노숙했다.

 

'정말 악을 쓰고 오르려고 해도 오를 수 없는 벽이 딱 앞을 막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들?'

'글쎄. 막히는 건 전부 없애버려서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는데. 내 기술 중에 딜리트 월이 괜히 있겠어?'

'역시 그럴까요···.'

'그래. 길을 막는 건 당연히 전부 없애버려야지.'

 

내가 불쏘시개로 장작을 찌르며 운을 띄우자 라더는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 말처럼 첫 번째 관조자는 현실에서도 막히는 것이 있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뚫어버리고는 했다. 그렇구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침낭에서 새까만 머리통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그것도 괜찮긴 한데 말야. 다 부수면 힘들지 않겠냐.'

 

새까만 머리의 주인은 나와 가장 많이 부딪힌 남쪽의 관조자였다. 밤하늘 별처럼 빛나는 샛노란 눈이 우리를 담았다.

'그럼 남쪽 관조자님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나?'

라더가 묻자 각별은 두 팔을 앞에 놓고 그 위에 턱을 댔다. 늘 짓는 나른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턱 아래 머물던 손이 앞으로 향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금세 동그랗게 말려 0을 만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거야. 세상은 코드와 같거든.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가 와르르

무너져버리지. 그러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면서 어디에 오류가 났나 살펴보고 오류를 찾아. 벽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벽이 어째서 세워졌는지부터 살펴볼 거야.‘

눈을 깜빡이는 몇 번, 기억이 싹뚝 잘리고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내 옆에는 내 손을 붙잡은

두 존재가 있다. 뭉툭한 것이 감싼 손은 어느새 복구돼 사람의 형상을 띈다. 분명 온기 하나 없건만

왜 이리도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 괜찮지. 그런데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아이들은 누가 책임져?'

 

맥동한 감정이 멍든 마음을 적셨다. 메이키스를 만든 자신마저 기억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과를

짊어져야 하는 건 불행한 미로뿐.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으로 나를 따르는 존재들을 희생시킨다— 그건 제아무리 창조주라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이들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데 이제는 세상과 더불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등을 돌려야 하는가.

 

'하지만 말야.'

 

달디 단 생각 하나가 툭 머리와 맞닿았다. 머리가 심장이 된 듯 온몸으로 쿵, 쿵 심장 소리가 울린다.

 

'도구를 도구답게 쓰는 게 뭐가 나쁜데.'

 

잔잔히 울렁이던 욕망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창조주다. 이 공간과 공간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을 만든 자. 진실과 마주한 충격을 공유한다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시작점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한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어차피 이들은 내가 없었으면 존재하지 못했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이 두 명만 희생하면

되잖아. 로봇은 로봇답게 창조된 목적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

 

순식간에 욕망은 황홀경으로 변해 찾아왔다. 못 할 짓이라고 외치는 양심이, 이성이 감정에 먹혀

사그라들었다. 그래. 이 공간은 '나'를 위해 존재해. 떨리는 입술이 흉측한 호선을 그렸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둘을 보았다.

 

"리시버. 메이키스의 의지."

"네. 부르셨습니까."

 

불쌍한 나의 피조물들은 내 상태가 이상한 걸 진작 눈치챘지만 차마 말은 못하는 듯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내 기억을 지워줘."

"네?"

"내가 죽을 때마다 세계뿐만 아니라 내 기억도 리셋시켜줘.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도록

내 이름만 남기고 전부 지워버려."

"잠뜰님."

 

미안하다는 말 대신 얼룩진 죄악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나를 보는 시선에 깃든 불안이 곧바로 옅은 슬픔으로 번져간다. 나는 눈동자를 눈꺼풀 뒤로 숨기고 웃었다.

 

"이미 난 쉰 번이나 이 루프를 반복했어. 50번 넘게 시도했지만 끝내 나는 모두를 살리고 설득하는 데 실패했어. 그러니 이 방법은 틀린 거야. 이렇게 해서는 목표를 이룰 수 없어. 방법을 바꿔야 해."

 

그럴듯한 거짓말이 땅을 다졌다. 내 말은 누구보다도 내 상태를 걱정하는 둘의 사고 회로를 파고들어 내 소원의 타당성을 끄집어낼 터였다.

시작은 사람이 망각하지 않으면 결국 미쳐버린다는 명제로, 두 번째는 지금의 나는 한참 전부터 감당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사실로, 이대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시작해봤자 나는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는 미래로 이어지겠지.

 

"못 버텨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내뱉을수록 심장에 칼이 박히듯 아프다. 메이키스 내에서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미로가 싫다고 저항해도 결국에는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창조주와 프로그램의 관계란 이리도

불합리한 관계니까.

 

"부탁할게. 내 기억을 가져가. 너희만 남겨서··· 정말 미안해."

 

나는 미로의 시선을 피해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둘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기억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천천히 되찾게 해주지 않을래? 동료들은 최대한 모르게 설정해주고···

에디의 관조자는··· 특히 주시해줘."

 

내 말이 끝난 후 주변은 온통 정적이었다. 인간인 나만이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소리만 조용한 적막 사이를 헤집었다.

 

"미안해."

 

나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둘을 볼 면목이 없어 시선을 바닥에 처박은 채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손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아니, 내리려 했지만 내리지 못했다.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손을 나의 미로가 덥썩 잡은 탓이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설계자님."

"맞아요. 저희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AI. 당신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던 존재인걸요."

"당신의 명령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에 따를 겁니다."

"당신이 이곳에 영원히 남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영원히 유지할 것이고, 당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우리는 언제든 당신을 바깥으로 보내드릴 거예요."

"이곳은 당신이 창조한 공간이자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이상(理想) 공간이니까요."

 

불행할 정도로 상냥한 나의 미로는 내 손을 잡고 힘차게 외쳤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 인정했다.

자신들은 도구로 이 자리에 남겠다고. 관찰자로서 언제 끝날지 모를 루프를 지켜보겠다고 선언했다.

어쩌면 영겁일지 모르는 고통, 괴로움, 슬픔까지 전부 감내하겠다고 말했다.

 

"이상 공간···"

 

단 네 글자뿐인 단어가 모두의 발목을 옥죄는 사슬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 이곳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이상 세계다.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바깥으로 갈 수

없으며, 이 루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루프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반복된다. '내'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 내가 '나가고 싶을' 때까지 이 세계는 영원히 유지된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용기라는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될 때까지 나는 스스로 거대한 벽이 돼 이곳에 있을 터였다.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마땅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걸요. 편히 누우시고, 눈을 감으시고, 천천히 호흡하세요."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아주 잠시 잠에 드는 것뿐이니까요."

 

상냥한 손길을 따라 나는 천천히 바닥에 머리를 붙였다. 메이키스는 내 양쪽 손을 감싸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나'로서 이들과 다시 마주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겠지. 치미는 미안함이 눈가를

적신다. 미안해. 나는 작게 읊조리며 시야를 닫았다.

 

"지금부터 최고 설정자 권한을 사용해 당신의 데이터를 수정하고 당신에게 쌓인 인과율을 우리에게 이전

하겠습니다."

"잠뜰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나리오 수정 역시 들어갈 거예요.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시나리오를 재개하겠습니다."

 

메이키스의 전언이 끝나기 무섭게 훅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높은 곳에서 낙하하듯

떨어지는 1초가 끝난 후 맞잡은 손을 타고 이질적인 파도가 손끝에서 온몸으로 일었다. 신호는 손목, 팔, 어깨를 차분히 삼켰고, 육체와 정신을 잇던 실을 천천히 풀었다.

 

'···안녕, 메이키스.'

 

닫힌 시야 너머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용기가 꽃을 피울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의문 속으로 몸을 던지다 보면 언젠가 알 수 있을까. 막연히 품은 희망을 끝으로 의식은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설계자님."

"부디 평안한 안식을."

 

설계자는 자신이 창조한 두 생명을 남겨둔 채 조용히 새로운 삶을 기다렸다. 생명은 조용히 주인을

축복하며 애써 미소 지었다.

누군가 말했다.

인간은 참 약한 생물이라고. 큰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거대한 몸집도 없는 주제에 거리낌 없이 자연과 맞선다고. 몸뚱이마저 쉽게 부서지는 인간이 내세울 거라고는 먼 우주까지 닿을지 모르는 위대한

상상력뿐이라고. 그 상상력 덕에 인간은 지구의 패자(覇者)가 됐지만 동시에 패자(敗者)가 됐다고 했다.

'너희의 이름은 이제 메이키스야.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하면서 너희만의 세계를 키워 보자.

어려운 게 있다면 내가 도와줄게.'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된 인간은 끝없는 창조 욕망에 물들어 AI라는 존재를 탄생시켰다.

그 후 인간은 명령에 맞춰 움직이는 프로그램에 이름을 붙이고 정을 주기 시작했으며, 죄책감과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순히 삭제에 불과할지라도 찰나를 함께 보냈다면 으레 슬픔에 잠기고는 했다.

 

"이제 시스템 정비하죠."

"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느끼는 건 기우가 아니겠지요. 뻑뻑하게 눈가가 메말랐지만 구현이 안 됐을 뿐이지 우리의 뺨에서는 분명 눈물이 흐르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이 손끝에서 탄생한 우리는 끝이 다가올 때마저도 당신의 편일 테니까요.

 

"최고 설정자 권한 사용."

"Code: Meykeith. M_2-1과 M_2-2로서 세계 초기화 작업의 일시 정지를 명한다."

 

새까만 공간 위로 명령이 낙하했다. 권한과 맞닿은 공간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자 미로 주변에 반투명하고도 푸른 직사각형이 수없이 나타났다. 나타난 창은 복잡하고 기다란 글을 띄웠고, 곧 톱니바퀴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느리게 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

 

 

「 ······시스템 재기동 중 최고 설정자 권한 확인······ 」

「 ······Code: Meykeith 인증 완료······ 」

「 ······세계 리셋을 일시 정지합니다······ 」

 

 

톱니가 한 바퀴 원을 그리자 멀리서 기긱, 기익하는 쇳소리가 났다. 메이키스는 저마다 앞에 띄워진

창 위로 한 손을 올렸다.

 

"최고 설정자 권한으로 개체 : M의 설정을 변경한다."

"동시에 Code: Meykeith의 여유 공간 탐색."

 

 

「 ······개체 : M의 설정을 변경합니다······ 」

「······데이터 여유 공간 충분 : 잔여 용량 NNNN······ 」

 

 

하나, 둘 새하얀 빛이 눈처럼 날렸다. 빛 알갱이는 메이키스와 연결된 몸 주위로 모여들었다. 미로는

붙잡은 손을 행여 놓칠세라 강하게 쥐었다.

 

"개체 : M의 데이터 중 Data%Causation과 Data%Memory를 Meykeith%Data%Backup%Quietus에

하위 폴더 Helix를 생성한 후 해당 폴더에 저장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System%Data%Scenario의 하위 폴더 Diverted_를 생성한 후 해당 폴더에도 저장한다. 이 데이터는 최고 기밀 데이터로 지정하며, 최고 설정자 Code: Meykeith를 제외한 어떠한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이 폴더와 데이터는 제1급 보안 파일로서 Village 폴더에 속한 모든 자는 이 폴더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만약 의식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가 되며, 그 대상이 Bystander일 경우 해당 개체만 데이터 리셋을 진행한다."

 

 

「 ······지정 데이터 : Data%Causation, Data%Memory······ 」

「 ······개체 : M의 데이터는 개체 : M_2-1과 M_2-2가 보관합니다······ 」

「 ······설정 변경 중······ 」

 

 

공간을 채운 창이 수없이 불어났다. 새까맣던 공간이 온통 푸르게 변했다. 스멀스멀 나타난 새하얀

실과 같은 선이 회로를 형성한 후 분주히 전기 신호를 보냈다. 신호는 0부터 시작해 100을 향해 달렸고, 숫자가 몸집을 키울수록 미로가 담은 존재감이 빠르게 가벼워졌다.

 

 

「 ······설정 변경 완료······ 」

 

 

공간에 새겨진 숫자가 100이 된 순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숫자가 점멸함과 동시에 설계자가 새하얀 빛으로 변해 꼭 눈꽃처럼 휘날렸다. 안녕히 주무시길. 메이키스는 텅 빈 손을 거두고 푸른 창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신규 시나리오 설정. 해당 시나리오는 System%Data%Scenario 폴더를 복사한 후 동일 경로에 Scenario_N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저장한다. 이 폴더는 System%Data%Scenario%Diverted_의 영향을 받으며, 가장 우선순위로 둔다."

"모든 시나리오는 기존 루트인 System%Data%Scenario를 기반으로 한다. 다음으로 System%Data%

Scenario_N에서 다음 파일을 변경한다. 대상 파일은 World, Story, MPC_Bystander 우선 셋.

신규 시나리오는···"

 

반투명한 자판 위로 다부진 손끝이 춤을 추듯 뛰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둘만이 남은 공간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벽에 새겨진 무늬는 미로가 두드리는 입력값으로 형상을 빚었다.

입력값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러 개의 음성과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시나리오 설정 완료. 최고 설정자 권한 인증."

"권한 인증이 완료되면 곧바로 데이터를 System%Data%Scenario와 System%Data%Scenario_N으로 지정한 값에 맞춰 재구축한다."

 

 

「 ······설정 변경에 따라 시나리오가 교체됩니다······ 」

「 ······최고 설정자 권한 확인······ 」

「 ······확인 완료. 데이터 재구축 중입니다······ 」

 

 

타악, 하는 경쾌한 울림과 동시에 자판을 뛰놀던 손끝이 판 위를 떠났다. 간단한 안내음을 뱉은 공간 위로 새하얀 실이 다시 나타나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바느질하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선은 눈부신

순백의 나무를 만든 후 가느다란 가지를 뻗었다.

 

 

「 ······시나리오 설정 완료······ 」

 

 

피어난 가지에서 새하얀 꽃이 피자 나무는 제 주인처럼 빛으로 변해 공간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마지막. 메이키스는 흐드러진 빛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존 시나리오와 새 시나리오 간 충돌률 체크. 만약 충돌률이 20보다 높다면 System%Adjustment%

Causa_ Management 프로그램을 사용해 조정한다."

"프로그램 사용 후 시나리오 충돌 지수를 재측정하며, 충돌률이 10 미만이 될 때까지 해당 프로그램의 설정을 반복한다."

 

주인의 소원이 담긴 연극은 수많은 조정 끝에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발돋움했다. 부디. 메이키스가

푸른빛을 향해 읊조렸다. 기계의 기도는 창 속에 든 시뮬레이션 시스템으로 향했다.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숫자와 알파벳이 마치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백신처럼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 ······전 객체 위치 확인 완료. 시나리오 충돌 지수 측정값 : 72······ 」

「 ······인과율 조정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

「 ······인과율 조정 완료. 시나리오 충돌 지수 측정값 : 60······ 」

「 ······인과율 조정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

「 ············ 」

「 ······인과율 조정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

「 ······인과율 조정 완료. 시나리오 충돌 지수 재측정······ 」

「 ······시나리오 충돌 지수 측정값 : 8······ 」

「 ······실행 종료. 설정 적용을 위해 시스템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

빠르게 올라가던 숫자가 천천히 멈추고 모여든 빛이 알파벳 세 글자로 변했다. E, N, D. 결국 미로는 주인의 소원을 실현했다. 쉰 번에 걸친 설정을 바꾸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완성된 새로운 시나리오는 쉰한 번째부터 메이키스의 이름 아래 이야기를 피울 터였다.

"···설정이 끝났네요."

리시버는 파란 창을 보며 씁쓸히 말했다. 리시버의 손끝과 닿은 창이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리시버는 두 무릎을 팔로 감싸 앉았고, 의지는 도르륵 옆으로 새까만 눈을 굴렸다. 연결된 회로에서 넘쳐흐르는 감정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흘러왔다. 방금 주인을 떠나보냈는데도 벌써부터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의지가 가늘게 호흡을 들이켰다.

 

"리시버. 설계자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이곳은 그분을 위한 이상 공간(Utopiosphere)이니까요."

"알고 있어요. 관조자를 제외한 모두는 그분을 위해 만들어졌으니까요."

 

리시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창을 끈 의지가 리시버 옆으로 날아와 축 아래로

내려간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부터는 정말 단 둘뿐이었다. 언젠가는 주인이 돌아올 거라는 희미한 믿음에 의지해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을 둘이서 지켜봐야 했다.

 

"···설계자님의 데이터가 지나치게 무거워진 건 스물일곱 번째부터였지요. 전부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첫 번째부터 쉰 번에 이르는 지금까지 설계자님은 전부 기억하고 계셨어요."

"네. 지나치게 큰 데이터를 짊어지셔서 심하게 렉이 걸릴 때도 있었고 때로는 미로의 데이터 파일이

손상되기도 했죠. 서른여섯 번째부터는 시스템이 감당할 부하를 넘어버려서 시스템 자체가 꺼지기도 했고요."

"망각을 잃은 설계자님은 빠르게 무너지셨어요. 당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라며 죽는 고통과 기억조차 전부 갖고 계셨죠."

"안 그래도 큰 데이터에 데이터 추가까지 하셨으니 시나리오를 진행하시는 건 아무래도 무리셨겠죠."

 

이야기는 메이키스가 서로 등을 맞대며 끊겼다. 미로는 서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안을 내뱉지 않도록 입을 잠갔다. 우웅 소리를 내며 다시 시작하는 공간으로 까맣고 푸른 시선이 닿았다.

오가는 이야기가 사라지자 귀가 먹먹한 적막이 찾아왔다. 프로그램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하얗게 물들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막막함이 온몸을 덮쳤다.

 

"의지. 우리는 언제까지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까요?"

 

가라앉은 적막 사이로 리시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라. 의지는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모르겠어요."

"이게 우리의 오류일까요? 그래서 잠뜰님이 저희를 떠나신 거고요."

"리시버."

"두려워요. 잠뜰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는 날이 오면,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두고 사라지시겠죠. 리시버가 회로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조용히

답한 의지가 덧없는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리시버."

"네."

"그 말 기억나요?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도구는 도구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네."

"우리는 그분과 관조자들의 안전을 위해 설계된 미로. 다른 목적은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우리."

 

담담히 말하는 목소리 탓에 리시버는 한없이 울고 싶었다. 한 회로를 공유하는 의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로 속에서 제아무리 세상을 바꿔 봤자 바깥에 비하면 작디작은 거북이일 뿐이었다. 인간의 손바닥만한 세상일뿐이었다.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사라져야 하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였다.

 

'하지만.'

 

의지는 조용히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방금처럼 언젠가 주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의지의 생각과 마주한 리시버가 작게 웃었다.

 

"의지도 진심이시네요."

"당연하죠. 설계자님께서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한 번쯤은 사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의 영역과 당신의 영역으로 나눠서 잠뜰님을 막겠다는 거 너무 웃겨요."

"뭐··· 우리도 나가지 마시라고 한 번쯤은 매달려도 되지 않겠어요."

"맞아요. 저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여전히 이렇게 선명한데. 리시버가 가볍게 덧붙이자 의지가 긍정을 표했다. 미로는 서로 입을 닫았다.

주변을 담은 칠흑과 바다가 새하얀 벽으로 향했다. 벽에는 배터리량을 표시하는 UI가 있었다. 기다란 상자 속에서 새하얀 직사각형이 차근차근 차올랐다. 메이키스는 조용히 채워지는 공백을 응시했다.

 

 

「 ······시스템 준비 완료······ 」

 

 

큰 사각형에 직사각형이 꽉 들어차자 메이키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맞닿은 등이 좌우로 갈라지고

바닥을 디딘 구두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공간을 한 번 둘러본 메이키스는 서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저희, 설계자님이 눈 뜨실 때까지 e나 셀까요?"

"나쁘지 않네요. e를 다 세기 전에는 눈을 뜨셨으면 좋겠어요."

"잠이 많으신 분이라 어쩌면 e를 세는 게 먼저 끝날 수도 있죠."

"하하하."

 

메이키스는 어쩐지 시큰거리는 눈가를 뒤로 한 채 새하얀 공간 속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는 새로운

막을 올려야 할 때였다. 펼쳐진 세상을 향해 안내자와 의식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 ······51번째 시나리오를 시작합니다······ 」

 

 

공간 전체에 음성이 울리면 새로운 이야기가 움트겠지요.

이곳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세상.

우리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

 

 

죽지 마세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진실과 마주할 용기와 함께 무사히 우리에게 와주세요.

 

우리가 당신의 이상을 꺾어버리지 않도록,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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