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8.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졌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보았던 숫자였다.
"웬일이야? 네가 연락을 다 하고."
"그냥. 한 번 할 때 됐잖아?"
"그렇긴 한데, 항상 내가 먼저 연락했었으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지."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내가 연락하려 할 때마다 네 연락이 왔을 뿐이야."
"어련하시겠어요."
저게 머리 컸다고 대들기까지 하네. 각별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뱉어내며 한 말이었다.
각별은 공룡에게 언질 주어야 할 것이 있었고, 마침 그를 불러낼 그럴싸한 구실도 생겨 곧장 연락을 취했을 뿐이었는데.
몇 달 전, 오밤중에 각별을 불러내어선 다짜고짜 바다를 보러 가자며 떠났던 충동적인 여행 이후
처음 마주한 낯빛임에도, 전과 변함이 없기는커녕 더욱 능청스러워진 듯했다. 저의 생각보다도 맑은 모습의 공룡을, 각별은 다소 언짢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의 그가 입 밖으로 꺼내게 될 언어들은 결코 그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왜 불렀는데?"
"뭐가."
"아니, 사람을 불렀으면 뭐가 됐든 이유가 있을 텐데. 할 말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별거에 다 의미부여 하네."
"표정 보아하니, 내가 딱 맞춘 것 같은데. 맞지?"
"...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해라."
"아, 예~ 예."
일순간 짜증이 일었던 각별은, 뒤따라 나오려던 언어들이 물꼬를 트기 전에 섣불리 잘라내고선,
공룡에게 짧은 경고를 하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공룡은 각별의 심경을 알아챘음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터이니. 각별은 공룡의 그러한 태평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만간 하게 될 저의 말을 듣고도 별 볼 일 아니라 치부할까 봐, 그리고, 그의 태평함에 그를 증오하게 될까 봐. 각별은 공룡과 맞추어 떼어내고 밟아가던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었고, 비로소 그의 등 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단말마의 음성을 뱉으려다, 다시금 주춤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삼켰다.
"김각별, 왜 이렇게 느려. 두고 간다?"
허물없이 지내기를 바라던 공룡의 요청으로, 이따금 공룡에게 형 소리를 들으면 진저리를 치던 각별의 긍정으로 붙이지 않던 호칭. 어째서인지, 지금의 각별은 그때의 호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공룡에게 별달리 큰 신경을 쓰지 않던, 조금은 서먹하고 또 조금은 가까웠던 그때를. 그는, 당장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공룡과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해도 성인이 된 해에 연을
끊어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 놓인 상황'을 전제하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겠지만. 어릴 적부터 남에게 정을 주는 것에 있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던 각별이었기에, 그때는 공룡에게 왜 그리 유하게 대하고 제 철칙과 같이 지켜오던 거리를 어겨가며 다가간 것인지, 본인조차 통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깜짝아. 미쳤냐? 왜 얼굴을 들이밀어."
"도로 한복판에서 멍이나 때리던 너는 정상이고?"
"차도 안 오는데, 뭐."
시골은 아니지만, 번잡한 도시와는 떨어져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자아내는 사락대는 소리와 산 곳곳에 자리한 새들의 지저귐이 채우는 공간이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공룡은, 그렇긴 한데. 하며 뒷머리를 긁적이고선. 저 멀리에, 달빛을 등져 검고 흐릿하게 보이는 높다란
빌딩들을 올려다보며, 다문 입술을 달싹이다가.
"슬슬 말해주지? 나 이 정도면 꽤 오래 참은 것 같은데."
"나중에. 말해주기 전에, 너 나랑 할 거 있어."
"뭔데?"
"유성우 보기."
"... 뭐?"
공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각별은 유성우 따위나 올려다보고 있을 만한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고등학생 시절에도 극한의 이성적인 모습으로 유명했던 그였고, 그의 중학교 시절을 들어 보면
고등학생 때보다도 더욱 가관이었기에. 어찌 보면 지금의 각별은 나름 감성적인 편에 속했지만,
그것조차도 각별의 기준 내에서일뿐, 다른 이들과 비교하자면 냉소적이기 그지없었다. 공룡이 그의 말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유성우 몰라? 별똥별,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
"누가 유성우를 모른대? 그런 거 질색하던 네가 먼저 보자고 하니까 말이 안 나와서 그런다. 오늘따라
유별나, 너."
"원래도 별났어. 그리고, 나 변덕 심한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 알지. 아는데, 몇 년을 그렇게 살던 애가 갑자기 이러니까 놀라겠냐, 안 놀라겠냐."
"거 듣는 변덕쟁이 속상하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내 속 들여다보기라도 했냐? 하고, 따지려던 각별은 또 한 번 침묵을 유지했다. 저 낯빛을 언제까지고 볼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데, 시답잖은 말싸움을 해서 좋을 게 뭐 있냐는 이유에서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대던 각별의 안색을 살핀 공룡이, 그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알겠고, 어디서 볼 건데."
"우리 집 옥상."
"그게 거기서 잘 보이겠어?"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공룡이, 뱉어낸 말을 다시금 주워 담을 새도 없이 각별에게 핀잔을 들었다. 공기 맑은 도시 외곽인데, 그것 하나 못 보겠냐고. 뻘쭘한 듯, 괜히 시선을 맞추지 않고
먼 산이나 내다보는 공룡의 행태에 각별은 옅게 한숨을 뱉었다. 저 놈 저러는 것도 이제 그립겠네.
"일단 집 가자. 가서 시간이나 때우다 올라가지, 뭐. 저녁도 먹고."
"네 집은 한 번도 안 가봤던 것 같은데. 아니다, 집들이 때 한 번 갔던가?"
"기억력 참 나빠. 나 집들이 안 했어, 복작대는 거 싫어서."
"그러고 보니, 너 집에 남 들이는 거 진짜 싫어하잖아. 난 왜 들여보내?"
"너도 어지간히 싫은데, 오늘은 좀 괜찮네."
"말본새 하고는. 하여간에 좋게 말 할 줄을 몰라."
"네가 혼자 살아봐라, 말이 곱게 나오나. 입에 욕이나 달고 살지."
"너만 그런 거 아니고?"
"헛소리 할 생각이면 가라."
아이고- 죄송하네요, 김각별씨. 어깨너머로 건너오는, 장난기 그득한 목소리의 사과. 각별은, 이번엔 공룡의 목소리를 거슬려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장난스러운 어투는,
때때로 각별이 웃음을 자아내도록 만들었지만 이번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각별 스스로가 정해두었던 일종의 선을 넘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느낌을 받은 것은 분명,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인해 흐트러진 공룡에 대한 감정들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제 어깨 위로 왼팔을 두른 공룡의 행위로 제지당하였다.
"말 좀 하고 하라니까."
"뭔 생각이 그렇게 많으셔. 꼴에 나이 좀 더 먹었다고, 동생 앞에서 폼 잡는 거야?"
"넌 대체 뭐가 문제길래 그렇게 꼬였냐?"
"지는."
"허."
사람 기가 차게 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하며 맞받아치기 위해 숨을 들이쉬던 각별이, 등허리를 훌훌 털듯 세게 쳐내는 공룡의 손길에 도로 뱉어내었다.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금세 알아챘기에
그것을 제지하려 든 것이었다. 효과는,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각별의 화를 돋구어버렸고,
괜한 짓을 해 욕설과 함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공룡은 이제서야 분이 풀린 각별의 등 뒤에서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반항이었을 것이리라.
"빨리 안 와? 두고 간다."
공룡이 제 뒤에서 무얼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전에 그가 하였던 말을 되갚는 유치한 모습이란. 공룡은 혀를 차면서도 시야에서 멀어지는 각별에게 재빨리 달려갔다. 아무리 그가 밉고 얄밉다지만, 그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 애써 피하고 삐친 척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척'을 하면, 각별은 금방 알아채고 같잖은 연기는 집어치우라며 공룡을 한심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코앞이었네. 외벽 깔끔하고 좋은데?"
"내부도 그래. 너무 깔끔해서 문제지만."
"네가? 너 고삼일 때 한 번 가봤더니, 완전 돼지 우리더만."
"심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거든?"
"그렇다고 치자."
"이 자식이, 진짜."
종종걸음으로 각별을 제친 공룡이 그의 앞에서 혀를 내민 채 눈 아래를 끌어내리더니, 새하얀 외벽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이만 먹었지 하는 행동은 변함이 없구나, 생각하면서, 각별 역시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었다.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낸 낮은 소음이었다.
*
"너, 이게..."
"왜."
"이게 사람 사는 집이 맞아?"
"뭐...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새하얬다. 얼룩 하나, 심지어는 바닥에 발을 디딜 틈이 없어야 할 작은 원룸에 틈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놓인 것이라고는 큰 키의 각별이 몸을 구겨야 편히 자리할 수 있을 회빛 매트리스, 자그마한 TV가 놓인 검은색 협탁, 그 옆에 자리한 벽장엔 간단한 생필품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당장에라도 떠나야 한다면 떠날 수 있게끔 채비해둔 듯이 말간 풍경이었다. 공룡은 그 광경이 자신의 상상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턱을 죽 빼어 탄식 섞인 말을 뱉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종종 와서 내가 먹을 거라도 채워줘야지, 냉장고에 있는 거라곤 생수밖에 없네."
"그 전에, 내가 널 우리 집에 마음대로 발 들이게 해줄 것 같아?"
"안 되면 되게 하라. 몰라?"
"미쳤네, 이거. 아주 비밀번호라도 캐낼 기세야?"
"뜯어내라면 뜯어낼 수야 있지. 넌 캐물으면 못 견디고 알려주잖아, 재미없게."
"그거야 네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꺼내니까. 진절머리 날 바에야 그냥 알려주고 말지."
"그러니까 네가 끈기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잖아."
"그거 너만 하던 소리거든? 너처럼 달려드는 애 옆에 둬봐라, 기력 딸려서 금세 포기할 걸."
"아, 그래, 내가 미안하네요. 그래서, 이 텅 빈 집에서 뭘 하겠다고? 이제 열 시인데. 못해도 네 시간은 남았어."
"생각 좀 해보지, 뭐."
"너 진짜 어이없는 거 알아?"
공룡의 얼빠진 표정이 제법 우습다 생각하며, 각별은 대꾸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자그마한 매트리스에 몸을 뉘일 뿐이었다. 각별의 행태를 지켜보던 공룡 역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그저 칠흑빛 벽장에 몸을 기댄 채, 다음에 이 집에 들릴 때는 무엇을 채우고 어떻게 꾸며주어야 좋을까. 머릿속에 늘어놓을 뿐이었다. 각별에게 무슨 색을 좋아하냐고 물으려던 순간, 퍼뜩 떠오른 무언가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한 잔 할래?"
"뭘."
"맥주."
"애가 성인 되더니 툭하면 술타령이네. 됐어, 너 혼자 진탕 마시고 나 유성우 볼 때 여기서 뻗어 자던가."
"그냥 해본 말이야,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안 봐도 비디오지."
하다하다 떠보기까지 하네. 투덜대는 각별을 뒤로 한 공룡이 현관으로 향해 신발을 신었다. 무엇을
하는 것인고- 하니, 빈 냉장고를 채우겠단다. 냉장고가 이 꼬라지면 여태 배달 음식을 시켜먹은 것
아니겠냐고. 각별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만큼 빠져나가는 돈도, 일도 늘었다. 지갑을 챙겨 현관의 은색 문고리를 잡은 공룡을 말렸다. 냉장고는 자신이 알아서 채워두고 보여주기까지 할 테니, 우선 지금은 집에 있자며 그를 붙잡았다. 마음 같아선 그 손을 뿌리치고 달려 나가고 싶은
공룡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발이 무거웠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선 안 될 듯한, 이질적인 감정이 든
것이었다. 결국, 다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매트리스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영화나 보자. 할 것도 없고, 러닝타임 긴 거 보면 시간 가는 건 금방이니까. 아니면, 드라마를 봐도 되고."
"그래. 보자, 영화. 보고 싶던 건 있어?"
"딱히? 찾아봐야지. 러닝타임 긴 영화 두 편 정도 보면... 유성우 제일 많이 떨어지는 시간이겠네.
새벽 네 시."
"괜찮다. 적당한 거 찾아볼게, 넌 저녁 시키고 있어."
"뭐 먹을래?"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상관없으니까."
"진짜지? 배달 온 거 보고 내 탓하기 없기다."
"그렇게 속 좁은 놈 아니다."
믿을게. 낮은 웃음과 함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짤막한 답을 내놓은 공룡은 적당히 취향을 타지 않는 치킨을 시켰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수능을 끝마친 각별과 함께 먹었던 한겨울의 통닭이 떠올라
내린 결정이었다. 각별은 제 취향에 걸맞는 장르의 영화들을 콕 집어 들이밀었다. 우연찮게 자신이
선호하는 영화 장르와 겹쳤던 공룡은 흔쾌히 승낙하였고, 각별은 곧바로 결제를 하였다. 때 알맞게
배달도 왔고, 타이밍이 좋았다며 밝은 웃음을 짓는 각별에 공룡은 묘함을 느꼈다. 역시나 이유는 없었다.
*
"... 나 참, 영화는 본인이 골랐으면서."
공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들은 저녁을 다 먹고 치운 이후부터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미 처음에 고른 영화는 끝이 난 이후였고, 두 번째로 골라두었던 영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즈음. 공룡의 곁에서 무언가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각별이 제 팔을 벤 채 곤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공룡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본인이 보고 싶어 고른 영화를 틀어놓고, 본인이 먼저 유성우를 보자고 말을 꺼냈으면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꼴이라니.
"대체 뭐가 문제냐, 형은."
새근히 숨결만 뱉는 각별에게 닿을 리 만무한 질문이 던져졌다. 감긴 눈 새로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길 바라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던 공룡이.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어 실소를 뱉어내고, 제 핸드폰으로 시선을 떼어냈다. 3:54.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비친 숫자였다.
"김각별."
"야. ... ... 야!"
"... 아, 깜짝아. 왜 소리를 질러."
"할 말이 그것뿐이야? 시계를 봐라."
아. 각별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의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잠시 상황파악을 하더니, 그가 메마른
입술을 떼어 꺼낸 말은-
"올라가자."
"빨리도 말한다. 가자, 얼른."
옥상으로 향했다. 각별은 별다른 생각 없이 잠을 깨려 노력하며, 공룡은 어딘가 찝찝한 감정을 품은 채로. 늦여름의 대리석 바닥이 자리한 복도는 그들이 너무 엷은 겉옷을 갖추어 입고 나온 것은 아닌지, 반바지 차림의 잠옷에서 긴 바지로 갈아입고 나와야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걱정은 생각보다 춥지 않은 옥상의 기온에 금세 뇌리에서 잊혀졌다.
"생각보다 괜찮네. 춥지도 않고, 운치 있고."
"하늘 봐. 별 참 많다, 그치?"
"그러게. 가끔은 한산한 곳도 좋구나."
평상 위에 몸을 뉘었다. 하늘을 수놓는 새하얀 별빛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 바다 여행 이후로 나누지 않았던 연락과 공백기를, 그들만의 화법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반딧불이의 울음이 잔잔히 퍼지고, 그들의 대화가 묻어나갈 무렵. 잠시 서로의 낯을 마주하던 것을 관두고,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보았을 때. 그때였다.
"떨어진다."
"진짜 많이."
"소원 빌 거냐?"
"아니."
"정공룡."
"왜."
"유성우 말이야. 눈 깜짝할 새면 사라져 있고, 다른 게 또 떨어져. 사실은 그게 뒤이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내가 방금 막 봤던 건지도 잘 모르겠어."
짧게 주고받던 대화가 멎어들고 생겨난 작은 틈을, 각별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선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공룡으로선 이해할 수 없이 갑작스러운 감상평이었다. 당최 모를 소리를 가만 듣던 공룡은, 다시금 각별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되게 뜬금없다."
"그냥 들어."
"응."
"있잖아. 난 저 유성우처럼, 너도 모를 새에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몰라. 그게 언제가 되었든, 나와 네가 친구일 때든, 아니면 멀어져 연이 닿지 않을 때든."
"그게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각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시선은 끝 모르게 높은 하늘에 고정한 채로. 침묵을 유지하며 옅게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공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무슨 감정이 들어차있을지, 어떠한 생각이 담겨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그 뜻 모를 한숨을 뱉어낸 공룡조차도,
자신의 머릿속을 알 터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난 너를 찾아 나서지 않을 거야. 그게 언제든, 너와 내가 어떤 사이일 때든. ... 난 여기서 기다릴 거니까, 형이 돌아와."
형. 각별은 형이라는 호칭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소는 여전했으며, 여전히 떨어져가는 유성우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공룡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각별을 향하였으나, 그것조차 한 순간에
불과했다. 이내 평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곤, '얘기 다 끝났으면, 간다.'라는 말을 남긴 채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4:43. 그가 옥상을 내려오며 보았던 숫자였다.
8월 12일. 공룡의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생긴 것이라면, 연락망에서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읽지 않음 표시였다. 몇 달 전, 공룡이 각별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 각별은 자취를 감추었다.
한바탕 유성우가 하늘을 메운 이후, 그 날 오후. 각별이 살던 집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회빛 매트리스, 흑색의 협탁 위에 놓인 작은 TV, 그 옆에 자리한 좁디좁은 벽장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는데, 각별만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도 그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일종의 느낌이 공룡을 떠난 순간이었다.
공룡은 각별의 집을 정리하지 않았다. 부탁하지도 않았던 각별을 대신하여, 월세를 내는 것도, 집을 관리하는 것도 그가 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각별에게 들었던 소소한 취향들이 떠오르면 그것에 맞추어 새하얗게 비어있던 벽면을 채웠고, 종종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을 가구들을 배치하고 꾸미기도 했다. 골탕이라도 먹어보라는 식의 시덥잖고 속이 빈 장난이었다.
8월 23일. 공룡이 울었다. 별달리 큰 이유는 없었고, 그 날은 그저 기분이 울적하였던 탓에. 그리고, 홀로 참아내던 고요함을 조금이나마 잊어보기 위해. 그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누군가 위로해주기를 바라며 자아내던 음성을 떠올리며 소리 내어 울어보기도, 속이 상해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입을 틀어막은 채 울적함을 떠내려 보냈다.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잠시 현실을 빠져나오고 싶어 했을 뿐이었기에, 그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눈물은 자연스레 멈추었다. 다음 날 눈이 부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9월 2일. 공룡이 오랜만에 바닷가를 찾았다. 나를 이끌고 찾았던, 달빛이 비치는 파도가 어여쁘던
그 바닷가였다. 홀로 맥주캔을 기울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편의점 바깥으로 나온 공룡은 빈손이었다. 아마도, 초봄의 그때가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공룡에게 맥주가 권해졌고, 공룡이 거절했다.
차 끌고 온 놈이 술은 무슨 술이냐며, 완강히 거부했다. 조용하고 차가운 밤바람이 뭐 그리 좋은지.
잔잔하다가도 일순간 거세지는 파도의 소리를 감상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엉뚱하고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9월 11일. 공룡의 생일이다. 공기가 텁텁해지는 계절을 맞았고, 여전히 그는 혼자였다. 주위의 지인들과 맞아야 했을 생일인데, 그는 지인들과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인들의 부름을 모두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는 집을 나섰다. 그가 제 집을 떠나, 제 생일을 낭비하여 도착한 장소는,
비로소 모든 것이 갖추어진 각별의 집이었다. 각별의 취향대로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공룡의 성격이 묻어나는 따스한 색감이 그 좁은 공간을 빽빽이 채웠다. 공룡은 TV를 켰다. 그리고, 영화를 틀었다. 과거 각별과 채 마무리하지 못했던, 절정에서 각별의 손길에 의해 멈추어졌던 영화가 3개월이 흘러
지금에서야 다시 재생되었다. 공룡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누군가도, 하다못해 자축을 위한 케이크조차도 자리하지 않았다. 공룡의 생일은, 그렇게 끝을 맞았다.
아니, 끝을 맞을 뻔했다. 영어가 뒤섞이던 방 안에 일정한 도어락 소리가 울렸고, 공룡은 미소를 지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젖혀지는 문의 소음에 따라, 공룡도 차차 눈을 떠내었다.
말간 동공을 한 채로 그가 취한 행동은,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공룡은 눈매가 휘도록 웃었고, 그의 눈앞에 자리한 긴 흑발의 사내는 몇 개월 간 닫혀있었던 제 입을 열었다.
"나, 돌아왔어."




" 3:54. 4:43. 11:58. "


W. 성휘 | I. 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