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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항어 | I. 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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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가 너무 많아, 아플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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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거슬린다거나, 묘하게 신경 쓰인다는 표현들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가?

 

어떤 한 단어라고 딱 정의하기에는 애매하고 무어라 할 수 없는 이 감정은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또 불쾌해서, 때론 시간을 써서라도 알고자 하지만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끙끙 앓고

짊어지고만 있는... 그래, 그런 게 있냐는 말이었다.

 

제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을 침범하고 장악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대단한 감정은 아니지만, 마음 한쪽에

고이 쌓아두고 차마 버릴 엄두는 나지 않아서 찜찜한 기분 그대로 남겨둘 수만 있는 어떤 것.

공룡은 현재까지 이렇게만 정의했다. 긴 감상평이었지만, 딱히 대체할 말도 없어서 방치만 해두고 가끔

들춰보기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놓고 보니 참 답이 없긴 매한가지라, 공룡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중요한 일들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나 머릿속에 쌓아두고 있는 게

어찌 보면 굉장히 한심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공룡 그에게는 상당한 문제였다.

 

벌써 반년 째를 달리고 있는 이 감정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관련하는

한 인물을 주체로 했다.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심지어 웬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내일도 쭉

보게 될 누군가. 물론, 좋게 마주하고 있진 않지만. 공룡은 작게 중얼거렸다.

 

안타깝지만, 공룡은 그 애와 전교 등수를 다투는 상황 외에도 그 애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그 애가 아니었다면, 선의의 라이벌이라며 겉으로는 하하호호 웃어줄 수도 있을 정도로. 질투?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질투나 선망 같은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기엔 공룡은 이 감정이 거북했다.

 

왜, 한 번쯤 만난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 사람과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며, 왠지 모르게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강한 거부감이 드는 상대방 같은 거.

 

공룡에겐 얘가 그랬다. 같은 고등학교, 끝과 끝 반. 라이벌. 좋게 본 적이라곤 하나도 없는 반년 째 악우.

공룡이 친히 그에게 달아준 객관적인 수식어였다.

 

 

 

 

 

 

 

 

 

 

음, 뭐라고 할까. 이 지독하고도 질긴 악연을 설명하려면, 공룡과 그 애가 처음 만났던 시작점인 1학년 입학식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룡이 그 애에게 느끼는 감정을 손쉽게 단어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없듯,

그 애와 이어진 억척 같은 인연 또한 얼기설기 얽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일만큼 복잡했다.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해 학생들에게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안겨주는 날이었고, 날씨는 그럭저럭

화창했던 걸로 기억한다. 새로 적응해야 할 학교 강당에서 삼삼오오 모여 입학식을 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벼서 작은 소음들이 끊이질 않아 무척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그중에서 공룡은 이전 학교에서 올라온 안면 있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실없는 잡담을 나눴다. 얼마나

흥미 없던 대화였던 건지, 지금은 그때 무슨 어투로 나눴는지 모조리 잊어먹었다. 뭐, 그냥 입학식 언제 끝나냐, 반 배정은 어떻게 될까...하는 둥 걱정과 설렘이 반씩 담긴 것들이었겠지.

 

다만 공룡은 그런 친구들의 대화를 배경 삼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간간히 맞장구만 치고 있었고, 솔직히 생각하기에 공룡은 친구들의 그런 심심찮은 고민이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그야, 난 어떤 상황이 되든

이전처럼 잘 생활할 수 있는걸. 자신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는 약간의 자만심이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십 년을 하고도 몇 년은 더 살아온 제 인생이 무척이나 순탄하다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게 환경뿐만 아니라 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한 영향이 상당수 포함되어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가끔씩 속에서부터 주체모르고 퐁퐁 솟아오르는 자만심을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그런 건

바보들이나 하는 거지, 저는 속으로 만족하며 느긋하게 즐길 뿐이다. 이 정도는 누릴 수 있는 거 아닌가? 제 감정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멍청이들보다는 엄연히 건전한 처사니까, 공룡은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안녕."

 

 

그러다 불쑥 들어온 담담한 목소리는 공룡의 상념을 단번에 깨버렸다. 공룡은 그 인사에 몇 번 두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돌려 제게 인사를 건넨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초면이다. 아님 내가 기억을 못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무표정인 상대에 반해 싱긋 미소를 걸고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친해지거나 조금 많이 외향적이라 나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줄 알았다. 이제 인사를 받았으니 내 옆의 다른 애들한테도 인사를 하겠지? 그럼 걔들에게 맡기고 난 조용히 기다려야...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치."

 

"어?...어, 그러네."

 

 

뭐지. 내 옆에 있는 애들이 안 보이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공룡의 옆에 앉아있는 다른 애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꿋꿋이 자신만을 향한 눈빛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는 이에게 반사적으로 대답을 해주는 공룡은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했다. 갑작스레 제게 인사를 건넨 이가 낙천적이고 좀 많이 활달한 성격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공룡은 버젓이 공룡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 분명한 그들에게 훑어보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일단 한 사람에게도 인사를 했으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일행에게

눈인사라도 주고받아야 하는 게 기본적이지 않나? 제가 알고 있던 상식이 투둑, 하고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걸 매정하게 내쳐버리면 또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라서, 그저 애매한 미소만 지으며

제게 인사를 건넨 상대방의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자니...그 상대방의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야, 박잠뜰! 너 뭐하냐."

 

"아, 김각별. 이제 발견했냐? 나 인사하잖아."

 

"인사?"

 

"응, 새 친구들에게 인사 중이었는데."

 

 

그렇지? 공룡에게 다짜고짜 인사를 건넨 이의 이름은 박잠뜰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친구로 보이는

애는 김각별이라고 하고. 잠뜰, 이라고 하는 애는 친구가 다가오자마자 방금 제 주변 친구들이 보이지 않던 것마냥 행동하던 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친구들에게도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약간 민망해진 분위기 속에서, 제 친구들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듯싶어도 받아주더라.

 

 

"새 친구를 만나서 많이 반가운 마음에 그만 먼저 인사를 해버렸네. 너무 무례했다면 사과할게."

 

 

걔는 아까 그 무덤덤하고 감정 한 톨 없던 표정과 말투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처럼 방금 웃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그에 제 친구들은 아아, 하며 이해했다는 목소리로 그 애와 몇 마디를 마저 나눴다. 그 속에서

혼자 어색함을 느끼는 존재인 공룡은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ㅋㅋ"

 

"그치? 역시, 이해해줘서 고마워."

 

"야, 잠뜰. 우리 가봐야 해. 다른 애들이 기다려."

 

"아, 맞다. 나중에 봐, 같은 반 되면 더 좋고."

 

 

각별이라는 친구의 말에 걔는 서둘러 떠나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내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떠나간 둘을 보며 제 친구들은 뜬금없긴 해도 꽤 괜찮은 친구인 것 같다며 진짜 우연으로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 애에 대해 마저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공룡은 그 대화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애가 가장 관심을 주고 있는 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별거 아녔다. 마지막으로 내게 준 걔의 시선이 너무 무감각했고, 이상하게...기분이 묘해서 말이다.

물론 나쁜 쪽으로.

 

뭐어...이 때 느꼈던 공룡의 느낌은 앞으로의 일을 예견한 직감이었던 걸까?

 

 

 

 

 

 

 

 

 

 

다음으로 그 애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건 중간고사 때였다. 그 후로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과는 달리 공룡은 2반이었고, 그 애의 반은 8반이었다. 거의 끝과 끝 반인데에 더해 각 반이 위치한 층수도 꽤나 멀어서 둘은 한 달이 조금 넘을 동안에도 스쳐 지나가는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용케 같은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공룡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입학식에서 한번 본 거 가지고 이렇게 질질 끌면서 그 애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고 있는 것도 좀 웃겼다. 게다가 걔는 입학식에서 말하던 말투와 공룡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 치고는 공룡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그 애와 마찰이 있어야 일어나든 말든 하는 건데,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그 애가 되려 약간 궁금해질 정도였다.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입학식에서 그 애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을 수도 있지. 원래 그런 성격일 수도 있고.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에, 공룡은 혹시 그 애와 마주칠 일이 있을까 봐 항시 긴장했던 상태를 풀고 하던 대로 실컷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걔와 만나게 된다면, 미안하다는 말과 앞으로 잘 지내보고 싶다는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드디어 중간고사 마지막날이었던 터라, 시험을 친 공룡은 평소보다 일찍 친구들과 하교한다.

공룡은 유난히 붕 뜬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 애와는 꽤나 잘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날.

 

공룡은 걔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꽤나 잘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개뿔, 꽤나 잘 맞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심하게 안 맞을 수도 있겠다.

 

 

팔랑팔랑 -

 

"이거 봐봐. 세상에, 내가 2등이래. 2등."

 

"...응, 그렇네."

 

 

눈앞에서 그 애의 손에 흔들거리는 성적표를 물끄러미 보았다.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성적표를 이리저리 도통 가만두지 않는 것에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성적표의 주인이 자기가 2등이라고 하니까 그런 거겠지 했다.

 

근데, 어쩌라는 건데. 공룡은 입학식 때와 같이 다짜고짜 남의 반에 쳐들어와서 이도 저도 못하게 저를 붙잡고 있는 걸 보며 흐린 눈으로 멍하니 있었다. 자기가 전교 2등이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자랑하고

싶었던 건가? 그렇지만 자랑한다기엔 이건 뿌듯하단 투의 톤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만을 가득 담고 있는 것에 가깝다.

 

뭐가 불만인 거지? 전교 2등 정도면, 1등은 못했더라도 충분히 잘한 거 아닌가. 오히려 공룡은 잠뜰의 성적표가 신선했다. 비록 제 친구들이긴 하지만, 그들 중 전교 등수가 한 자릿수일 만큼 공부에 뜻이 있다거나 잘 하는 친구들은 아니라서...남의 성적표가 이렇게 깔끔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 보다 보니 눈 아프다. 생각을 하다 말고 공룡은 눈을 슬쩍 돌렸다. 공룡 딴엔 순전히 제 눈의 안정과 멀미 예방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애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라, 잠뜰은 더욱 미묘한 표정을 짓고 여러 감정이 섞인 채 격양됨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2등이라니, 진짜 처음이야. 이런 거."

 

"한번 경험해봤으니 다음부턴 또다시 경험하지 않도록 대비하길 빌게."

 

"그리고 넌 1등이고. 안 그래?"

 

 

정공룡.

 

그 애의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린다. 내가 얘한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던가? 입학식 때 말고 처음

보는 거니까, 아마 없을 텐데. 뭐, 누구한테서 들었거나 명찰 보고 안 거겠지.

 

평온한 눈동자로 눈만 끔뻑였다. 제 앞에 서 있는 이는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화가 많이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처음 겪어보는 이런 경험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어쩔 줄을 모르고 무턱대고 들이대는 것처럼 보였다. 공룡은 이런 이들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개 영민한 사람들이라서, 공룡이 그 상태에서 몇 마디 얹어주기만 하면 제각각의 판단을 내리고 다시 평소대로 행동하곤 했다.

 

이번 일도, 지난번들과 마찬가지로 공룡이 몇 번 입을 열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절 과시하고 자랑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이 몰려오긴 하지만, 잠뜰에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갚는 셈 치자 싶었다.

 

 

"응. 그래서?"

 

"그래서라니..."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는데, 네 말의 요지를 모르겠어."

 

 

얼굴에 선뜻 다정한 미소를 걸쳤다. 목소리로 부드럽게 내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음, 그러니까...당연한 거 아냐? 내가 1등이고, 네가 2등인 게."

 

 

나는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걸.

 

네가 날 아직 잘 몰라서 이렇게 찾아올 순 있겠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말았으면 해. 너무 당연한 결과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따진다는 건 생각보다 서로에게 체력 소비가 큰일이라서. 공룡은 진실로 그녀가

제 말을 이해하고 순응하기를 바랐다. 그런 바람을 꾹꾹 담아 말을 마치고 그 애의 반응을 살폈다.

 

그 애는 공룡 제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공룡이 너무 당연하다는 투로, 그게 진실이라고

자연히 믿고 있다는 투로 그녀에게 고하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실이라 뭐라 할 수 없을 테지, 공룡은 이다음에 올 그녀의 반응을 어림짐작하고 속으로 남모를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건대, 공룡은 이런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깨우쳐주도록 하는 게, 그들의 반응을 감상하는 게 즐거웠다. 이 감정이 뭔진 아직 정확히 제시할 순 없었지만, 기분이 다시 수직으로 상승하는 걸 보니 제게

해로운 감정은 아니겠지.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침묵이 점점 길어졌다. 공룡은 느긋하게 잠뜰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아마도 잠뜰은 공룡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답을 내놓을...

 

 

"그래? 그럼 곧 그 기록도 곧 깨지겠네."

 

 

나한테 친히 이런 경험을 선사해 주었으면, 응당 나도 똑같은 대가를 치뤄야하니까. 대신, 시간 좀 걸릴 것 같아. 좀만 기다려줄래?

 

아, 또 입학식 때 표정이다. 그 무덤덤하고 감정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 건네 오는 어투는 제법

상냥했지만,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굳게 닫힌 무표정을 그 애는 보이고 있었다.

 

이내 그 애는 얼마나 걸려야 할까, 몇 달? 반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다음에 또 오겠다며 무작정 공룡의 반에 찾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 덜컥 공룡의 반을 나가버렸다.

 

공룡은 딱히 그녀가 나가는 걸 붙잡지는 않았다. 말했다시피, 예상에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따로 그녀가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다른 경험을 통해 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시, 새로운 학교라서 그런가 친구 하나 사귀기도 복잡하다고 실없게 생각만 했다.

 

입학식에서 그동안 공룡이 상대해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라 제가 예상치 못하게 혼자 첫 만남에

쫄아버렸다고 그는 믿었다. 그야, 그가 상대해왔던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인데 어떻게 이걸 보고 긴장하려했단 말인가.

 

그래도 기분 나쁜 건 몇 개 있었다. 친절한 자신이 직접 기회를 쥐어 주겠다며 나긋나긋하게 좀만 기다려 줄래? 하는 모습하고, 전혀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은 그 무표정. 그건 꼭 그 애가 갑이고 공룡이 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서, 공룡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갑을 관계가 성립될 리가 없으니, 공룡은 다음번에 만나면 그 애에게 그런 모습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칫 그 분위기에 다른 애들이 눌릴 수도 있으니까.

 

흠, 그러면 내가 지금 얘한테 느끼는 것도 그 분위기에서 나오는 건가? 공룡은 마지막으로 그 애를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를 들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북함이 그 애를 만날 때마다

차오르고 있었다. 거북함? 거부감? 둘 다 아닌가? 사실 정확하게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일단 그랬다.

 

 

"깊게 생각해야 할까...아님 관둘까."

 

 

마음 한켠에서는 이 이름 모를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다른 중요한 일이 산더미인데

이런 것 하나에 전전긍긍하며 고민할 시간이 없다, 로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승자는, 늘 그렇듯이 시간이 없다 쪽이었다.

 

그래, 내가 여기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그때가 되어서 해결하면 될 일이고.

 

스스로 그렇게 위안하며, 멍하니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다시 펜을 들고,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글자를 써 내려갔다. 방해만 될 뿐이라며, 그 애를 향한 왠지 모를 깊은 거부감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일부러 더욱 꾹꾹 깊은 곳에 눌러 넣었다. 공룡은 부정했지만, 이렇게 상념에 빠질 때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제게 쉽게 정의하지 못하는 걸 마주하는 것은 공룡에게 매우 서툰 일이었다.

 

그러면, 만약에...이 때 공룡 자신의 선택이 달랐다면...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과거에서 만약을 찾는 이의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달달 -

 

답지 않게 공룡은 다리를 떨며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나름대로 공룡 자신은 감정을 숨겨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어색한 표정과 도저히 가만있지 않는 행동들이 그가 불안한 상태라고 딱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공룡의 짝꿍이 걱정스럽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공룡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고 조금 어긋나 보일 정도로 과한 반응을 보일 뿐 누구에게 자신의 상태에 관해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있기를 한두 번, 공룡이 아직도 자잘한 소음을 만들어내며 주변에게 나 불안해요, 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는 걸 보다 못한 다른 자리에 있는 공룡의 친구가 일어나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그에 공룡은 별 거 아니라며, 제자리에 가도 좋다고 전혀 괜찮지 않는 모습을 풍기며 말한다.

 

공룡이 공룡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그도 똑같은 친구라고 비슷한 상어모자를 쓴 그 친구는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너 때문에 소음이 너무 울려서 집중이 안 된다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진 몰라도 혼자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조언이나 위로라도 받으라고 걱정 어린 마음을 담아 말하더라.

 

 

"아,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제서야 공룡은 자기가 다리를 달달 떨고 있다는 걸 알았던 건지, 괜히 공부하는 데 방해를 끼쳤다며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자신은 정말 괜찮다며, 어차피 이따가 해결될 문제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어모자를 친 친구는 공룡에게 영 미덥다는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금방 마무리될 이야기라고 하니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는 듯했다. 그치만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전히 보내오는 걱정 어린 시선 하나는 여전해서 공룡은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나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진짜 내일이면 끝날 문제였다. 내일 아침에, 성적표가 나오고 나서 자신은 그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 되는 결과가 예정된 문제.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오작동일 게 분명한 공룡의 직감은 계속해서 불길하다며 공룡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어서, 공룡도 내심...아주 잠깐, 이 직감이 가리키는 게 무슨 일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했으나 끝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졌고, 공룡은 예전과 다름없이 난 1등을 놓친 적이 없거든, 하며 그들의 처지를 일깨워주면 되는 일이었다.

 

공룡은 그런 역할을 잘했다.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사실만을 알려주는 일을 말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런 역할이어야 했다. 그런 역할이다.

 

정말로?

 

 

 

 

 

 

 

1학기 기말고사, 전교 2등 정공룡.

 

왜?

 

 

 

 

 

 

 

"헐, 내가 살다 살다 정공룡이 전교 1등을 놓치는 걸 보게 되다니."

 

"별일이다,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려나."

 

"해는 원래 동쪽에서 뜨는데?"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실 얘네들이 뭐라고 하는 진 중요치 않았다. 그냥, 그냥...

내가 정상이 아닌 상태인 걸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더 과격하게 반응하며 최대한 묻으려고 애썼다.

 

 

"에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잖아. 다음에 다시 1등하면 되지~"

 

"올, 생각보다 멘탈 쎈데. 나는 또 한 번도 1등 놓쳐본 적 없어서 이번에 멘탈 왕창 깨질 줄 알았는데."

 

"2등 한번 한 거 가지고, 뭘 ㅋㅋ"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애써 꾸역꾸역 만들어 입 밖으로 내뱉으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공룡은 제 친구들이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소처럼 대해주길 원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공룡은 이 순간 절실하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공룡이 마주했던 다른 이들처럼, 처음으로 맞이한 새로운 경험에 부딪혀 아파하고 회복할 그 시간이.

타인에 의해 갑작스럽게 깨달은 현실에 대해 적응할 그 시간이. 졸지에는 공룡 자신이 그렇게 1등에

집착하고 있었나, 1등은 원래 당연한 자신의 일부 아니었나? 하는 그의 본연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문까지 생각의 뿌리가 끝도 없이 솟아나서,

 

기분이 나빴다. 힘들어. 그만해.

 

 

 

 

 

 

 

 

며칠이 지났다.

 

공룡은 잠뜰을 다시 마주했다.

 

그 애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 맑은 두 눈. 그에 반해, 공룡 자신은 어떤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긴 했다, 다만 그 속이 진탕이라 문제지.

 

둘은 서로를 감싸는 지독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몇 분을 그렇게 바라보다, 결국 잠뜰이 먼저 입을 뗐다. 간단한 한 마디였다.

 

 

"대가는 어때?"

 

 

만족스러워? 네가 나한테 해준 것만큼?

 

그 뒤를 따라 속삭이는 것만 같은 말들이 뒤를 좇았다. 그 말에 공룡은 그냥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잠뜰은 답으로는 충분했던 건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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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애가 떠나간 자리를 멀끄럼히 바라보던 공룡은 그때서야 입술을 뗐다.

 

 

"...차고 넘쳤어."

 

 

대가가 너무 많아, 아플 정도로.

 

 

 

 

 

 

열등감. 같은 동족이라서 오는 근본적인 혐오.

 

 

공룡은 자신이 그 애에게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에게 이름을 붙였다. 입안이 씁쓸했다. 그동안 그 애에게 느꼈던 감정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만한 존재를 경계하고 멀리하려는 직감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눈을 감았다. 아직도 입안은 까슬하고 텁텁했다.

 

 

 

 

 

 

 

전교 1등 박잠뜰. 전교 2등 정공룡.

 

 

이걸로 3번째네. 2등은.

 

뭐, 이젠 지겹다시피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귀에 박힐 정도로.

 

바꾸려는 시도조차도 못하게 만드는 쓰디쓴 현실을 일깨워주는 단어 하나하나들을 입에 굴려보던 공룡은, 뒤에서 자신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휙 뒤를 돌렸다. 잠뜰이 서 있었다.

 

예의 그 미소를 띈 채, 잠뜰은 공룡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넨다. 성적 잘 봤냐고, 이번에 너랑 같이 스터디해서 그런가 점수가 더 오른 것 같다며 살짝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잠뜰은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얼핏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공룡은 그 모습이 더욱 가슴 한구석 어딘가를 콕콕 찌르며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다면 제가 너무 유난인걸까. 몇 번이고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미련만 흐르는 제가 꽤

낙천적인건가. 공룡은 속으로 누구에게도 하지 못해 자신에게만 물어보고 마는 질문을 던지며 잠뜰에게 답했다.

 

 

"그래? 다행이네."

 

 

나도 이번에 너랑 스터디하면서 공부 많이 되더라.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인 걸 그도 알고, 그 애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일단 얼굴을 마주하고, 멀쩡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공룡도 그 애도 서로에 대한 속내가 곪다 못해 썩어가는 중이긴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선의의 라이벌이자 꽤 사이도 좋은 친구였다. 둘 다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라서, 각자의 이득을 위해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가 이 관계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이런 수평적이고 어긋난 관계가 서로에게 이득일 수 있냐며 의문을 가졌겠지만, 적어도 둘이 그렇다는데 별 수가 있을까. 진심으로 둘은 지금 이 거리에 만족해서 말이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둘은 이 관계가 지속되길 빌겠지.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대가를 치룬 이들은 그것만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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